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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가네 뿌리찾기 writen by Oh Cheery,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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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오철 댓글 1건 조회 8,580회 작성일 06-03-0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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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가네 뿌리찾기

얼마전에 중국 한족이랑 내 조카가 결혼을 했는 데, 그 漢족 며느리에게 족보를 설명해주다가, 문득 나의 뿌리는 어딜까 생각 해봤다. 뭐 솔직이 뿌리는 수십억년전 아메바에서부터 출발 해서 500만년전 아프리카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식으로는 좀 곤란하고, 나는 古文을 조금 알고 쓰기는 하지만 종친회니 뭐니 하는 것들을 좋아 하지 않았다, 우선 1000년전 시조 1명에서 어째서 60만명 까지 늘어 났냐? 그것도 허무맹랑한 것이고 또 종친이란 건 결국 지역주의와 종파주의의 편협한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해 왔고 이는 사회 정의의 문란과 사회조직의 괴사로 이어진다는 것은 자명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살 씩 먹어 가면서 팝송 보다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그리 천박하게 안들릴 즈음에야 ‘아…물은 물대로 흘러 가는 구나’ 하는 걸 느꼈다.  특히 몇 년전 미국으로 이민간 후배가 미국대 한국 축구 시합에서 미국을 응원하는 자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걱정 말게나.. 언젠가 나이가 들면 그 뿌리를 찾고 느끼고 싶어 하는 날이 올 테니..’라고 한 마디 해준 기억이 난다, 뭐 그런 사고의 연장 선상에서 생각하면 된다.
조선 초기 5%의 성씨 가진 지배층이 어째서 지금은 90%냐? 이건 뭐 중간에 핏줄과 상관없이 마구 족보에 이어 붙인 것만은 사실이다. 기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말을 종반 어른들 한테 십여년전에 언급했다가 맞아죽을 뻔 했다. 허나, 심심풀이라도 ‘연어가 강물을 거술러 올라가듯이’ 한 번 죽 올라 가보자.

金幸(AD929) 안동 권씨 35세(代라는 말은 잘못 쓰이는 말이다.)니까 35世에다가 30년 한 세대를 곱하면 대충 1000여년전이 되고 거슬러 가보면 1명의 조상이 나오고 그가 바로 시조 권행(權行)이니 원래 김행 인데 고려태조 왕건으로부터 사성 받았다. 이 때 여담이지만 권행의 공로는 사실 오늘의 우리 민족이 있게 한 결정적인 역할이었다. 다 시들어가던 왕건이 여기서 기사회생 했으니 고구려(실제는 고려라 칭함)가 살아나고 삼국사기가 나오고 그래서 사실상 고구려의 광대한 지역과 역사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한 변형이라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인식은 곧 시대정신의 교차점 위에서 규정 되어지고 이용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김행은 신라왕족이라 했으니 경주 김씨 일거고, 그럼 그전에는 누구?

- 참고 940年  金镒 김일 (新罗国末代太子  一名 麻衣太子 亡命 黑龙江边 신라마지막태자 만주 흑룡강 부근으로 망명) -金函普 김함보(清王朝 皇室  ‘爱新觉罗‘ 祖先 청나라 황실의 조상) 신라 마지막 태자 김일이 만주 하얼빈 근처로 망명하여 부족을 이루고 그 후 손 김함보가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의 조상이 되니 그 의 성은 “애신각라”이다. 애신은 金이요 각라는 氏이며 뜻도 ‘新라를 사랑(愛)하고 신羅를 생각(覺)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누루하치가 조상의 나라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니 선조는 ‘상놈들이 무슨 동족?’ 이래서 명나라가 원정오고 연이어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아이러니 하게도 이로 인해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 했으니, 명나라가 계속 되었으면 중국의 일 개省으로 되어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의 金씨는 거의 만주족이고 원래 성씨를 청나라가 망하자 긴 것(애신각라)에서 짧은 걸(김)로 바꾸었고, ‘마지막 황제’ 영화에서 부의가 자신의 이름을 ‘애신각라부의’라고 말하는 장면을 기억 할 것이다.

  文武王 문무왕 김법민(AD660年) (三国统一, 以后 金氏王继续 삼국통일달성,이후 김씨왕족) 왜 문무왕이 나오냐 하면 이 사람이 그럼 김행의 조상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이 때 문무왕의 직계였다면 안동(고창)촌 구석에서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문무왕 즉 김법민의 능비 파편에서 찾은 글씨 때문이다. 그의 바로 위 조상은 奈勿王 내물왕(AD485) 이고. 그 위는 金阏智 김알지(AD65) 인데 이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러면 김행이 김알지의 후손인 것만은 분명하다, 분명하다기 보다도 더 이상 그렇게 밖에 설명 할 길이 없잖은 가?

이 비문중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0(판독불능)枝가 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투후 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하였다. •••15대조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下略)>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은 「투후 祭天之胤傳七葉」이다. 투후는 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霍去病(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休屠의 아들을 가리킨다.

문제는 이 김일제가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인이라는 데 있다. 이 碑文의 문맥상 문무왕의 조상은 匈奴人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음이 확실하다.

김일제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漢書와 列傳에 실감 나게 쓰여져 있고 서안에는 김일제의 무덤도 있다. 애매모호한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김일제를 문무왕이 『우리 조상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흉노 제국의 황제인 單于 아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 昆邪王과 休屠王이 다스리던 곳은 지금의 甘肅省의 草原이었다. 河西走廊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거쳐야 西域(중앙아시아)으로 갈 수 있었다. 漢武帝는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열고 서방과 무역을 할 이유가 있었다. 漢書에 따르면 기원 전 121년 이후 어느 해에 霍去病이 초원으로 쳐들어온다. 흉노 군대는 패배를 거듭한다. 곤사왕은 흉노제국의 황제인 單于로부터 문책을 당할까봐 두려워 休屠王을 꾀어 항복하자고 한다. 휴도왕이 거부하자 그를 죽인 혼사왕은 곽거병에게 항복하는데 휴도왕의 부인 閼氏(注-흉노어로 여인을 뜻하는 말. 金閼智의 閼智도 같은 말인데 뜻은 金이다. 알지는 알타이를 漢字로 표음한 것인데 알타이란 뜻이 金이다. 알타이=閼智=金=金氏는 알타이 산맥 근방의 흉노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와 아들 김일제, 그의 동생 侖은 霍去病의 포로가 되어 漢武帝에게 인계된다.

漢武帝는 그때까지 姓이 없던 김일제에게 姓을 내리는데 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한(祭天) 집안 출신이라고 하여 金氏라고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하여 金秉模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는 좀 다른 견해이다. 그는 金人이란 「알타이 사람」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알타이가 고향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책임진 일종의 샤먼 집안 출신이므로 알타이의 의미를 따서 金氏 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金氏 성이 탄생하는 단초이다. –조선일보 전재

金日磾 김일제(BC100) (字翁叔,本匈奴休屠王太子 자는 옹숙,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秺侯 투후(今 山东 菏泽 城武县 산동성 하택현 성무현) 위의 내용 대로 하자면 김일제가 곧 김씨의 조상이고, 

匈奴 休屠王 흉노 휴도왕(BC120) (汉武帝时霍去病将军杀他在今甘肃省 한무제시 곽거병 장군이 지금의 감숙성에서 그를 죽이다.)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도 자동적으로 金씨(?)가 된다.

秦国 穆公 진나라 목공(BC750) (秦始皇之 20代 祖先 진시황 20대 조상)휴도왕 이전에는 그럼 누구? 그 유명한 진시황의 할아버지 춘추5패의 하나 진나라 목공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거지로 같다 붙인거 같지만 진시황 통일후 한나라가 다시 진을 멸망 시키고 나서도 그 지역은 진의 왕족이 다스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래 글을 참조 해보면 완전 어거지는 아니라고 본다.
기원전 10세기 경에 목축으로 유명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가 주의 효왕으로 부터 진읍(秦邑:甘肅省 淸水縣 지금의 감숙성 청수현) 을 봉함받아서 진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후에 양공(襄公)에 이르러 산서성의 서부를 장악하는 제후국이 된다. 춘추시대의 기원전 7세기에 목공(穆公)에 이르러 정치를 혁신하고 서방 이민족 12국을 통합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서방의 패자가 된다. 그 후 전국시대의 열강으로 주변국들의 경계를 받다가 BC 247년 즉위한 왕 정(政)이 장성하여 모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면서 BC 230년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 조(趙) •연(燕) •초(楚) •위(魏) •제(齊)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다.
진(秦)나라는 감숙성 천수(天水) 땅에서 나라를 일으킨 뒤 섬서성 북서쪽에 있는 이곳 하서주랑을 차지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죽고 나자 간신들은 시황의 태자 부소(扶蘇)를 살해하고, 동생 호해(胡亥)를 내세워 천하를 주무르다 한고조인 유방에게 나라를 뺏긴다.

이때 훗날 재탈환을 꾀하고자 서북쪽으로 망명해간 세력이 태자인 부소의 계열, 즉 휴도왕 계열이라는 것이 한국문자학회 김재섭씨의 시각이다. 어쨌든 휴도왕 세력은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계속 한나라를 넘보았다.

한편 한나라를 세운 한 왕실은 이 하서주랑을 손에 넣지 않고는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땅이었다. 대대로 중원을 통치한 이들은 이곳에 사는 종족을 야만시해 흉노족이라고 낮춰 불렀다
그리고 모든 역사에 있어서 권력을 장악한 쪽은 모두 야만의 무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스제국,로마제국, 진한제국, 당,송,원,명,청. 고려,조선 모두 변방의 오랑캐들이었다. 알렉산더는 아테네 북쪽 야만의 땅 마케도니아 출신, 로마제국은 조그만 도시에서 출발했고, 진시황은 앞서 언급한바고, 한나라 유방도 이름 없는 조직폭력배 출신이요. 당나라 이연도 변방의 오랑캐, 송나라도 변방 절도사 조광윤이 세웠고, 원나라는 떠돌이 유목민 집단의 징기스칸이 세우고,명나라 주원장은 거지 출신에다가 일설에는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 났다는 말도 있고, 청나라는 물론 오랑캐(?) 족속이라고 공인 되고 있고, 이성계는 원나라에 붙어 살던 민족반역배의 일파 이면서 여진족의 피가 흐른 다는 말도 있고. 현대에 와서도 한 번 살펴 보면 참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진의 목공 위에는 누구? 참고로 김유신은 김해 김씨이나 그 의 조상 김수로는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5대손이라는 설인데 이들은 친척관계인 왕망이 전한을 멸하고 신(新)을 세운 뒤 곧바로 후한에 망하자 한반도로 도피했다고 한다. 실제로 문무왕 김법민의 비문에 씌어있는 신라 김씨 왕가의 계보에는 ‘투후’니 ‘성한왕’이니 하는 중국의 관작이 나타난다.

"신라(新羅) 사람들이 자칭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유신이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종손이라 하였으니 그러면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首露)도 신라(新羅)와 동성(同姓)이 되는 것이다"이라 하였다.

王莽 왕망(AD 23)  중국 전한(前漢) 말의 정치가, ‘신(新)’ 왕조(8∼24)의 건국자로서 자는 거군(巨君)이고 산둥[山東] 출생이다.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왕(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로서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되어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BC 33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BC 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되었다. 그뒤 왕씨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BC 8년 38세로 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다음의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애제가 1년 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사마에 복귀하였다.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자기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자기에게는 안한공(安漢公)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를 붙여 평제의 보정자(輔政者)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AD 5년에는 평제를 독살한 뒤 2세의 유영(劉 :宣帝의 현손)을 세워,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다.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벌였다. 이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하여 인간에게 표시되는 천명(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AD 8년 유영을 몰아내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이라 하여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하였다. 「신」이라는 명칭은 일찍이 그가 제후로 봉해졌을 때 新都候(신도후)라는 작후를 받았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舜帝 순임금(BC2320) 서기전 268년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안성왕 10년 중국 곡부에사는 공자님의 자손 공빈이 쓴 동이열전에 "우순이 동이에서 낳아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어 훌륭하게 다스리니 묻 임금위에 우뚝했다 ." 라고 쓰여 있다.
少昊金天氏(BC3000) 황제헌원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김씨의 시조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인데 황제헌원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으나, 원래 소호(少昊, 少 )라는 자가 있었으며 소호는 소전과 함께 웅족인데, 소호를 서쪽의 제왕(帝王)인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도 하는 바, 아마도 소호의 자손중 소호금천씨라고 기록된 사람이 황제헌원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충 기원전 3000년 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니 결국 중국이 조상인가? 이렇게 복잡하고 황당한가? 이렇게 되지만 어차피 오래된 건 신화의 일종이고 그 주제만 파악하여 이해 하면 된다. 여기서 태호 복희씨는 중국의 조상 화하족이고 소호 금천씨는 동이족의 조상이다. 라는 설도 있고, 황제(黃帝)의 자식이라는 말도 있고, 황제가 동이족 묘족의 조상 치우천왕을 탁록에서 무찔렀다고도 하고, 치우천왕(붉은 악마가 떠들어서 졸지에 우리민족의 조상으로 공인 되기 일보직전)이 속국인 황제를 쳐서 서 쪽으로 쫓아 냈다고도 하고 별별 말이 많으나 대체로 분명한 것은 김씨가 동이계 지도자 소호금천씨의 계열에서 나왔다고 추정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충 어거지로 라도 그 뿌리를 추적 해봤다. 어차피 성경에서도 그렇고 남녀1인의 조상에서 인류가 내려왔다는 식으로 귀결되는 것이 정석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추적 조차 현실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재료라는 것이다. ‘현실에 도움이 안되는 그 어떤 과거도 인정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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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님의 댓글

현무 작성일

  인류의 시초는 아반이와 아만이, 우리 배달민족은 단군 한배검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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